한해에 서른번 가까이 해외출장을 나가면서 전세계 수 많은 나라를 돌아 봤지만 부끄럽게도 전주는 초행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설레고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전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
맛과 멋의 도시로 알려진 곳, 전주 비빔밥, 한옥마을, 조선왕조의 태동 전주이씨, 한지...... 수 많은 키워드들이 전주를 대표하고 있지만 맛 보다는 멋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전주 출신들의 지인들을 생각하면 이 도시가 어떻게 그들을 키워내고, 넉넉한 심성과 멋을 가지고 살도록 했는지 이 곳을 잠시 둘러보면서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1박 2일간의 짧은 전주여행이었지만 전주 출신의 P대표와 함께 익산CC에서 18홀 라운드를 마치고, 한옥마을과 전주의 명승지를 둘러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른 새벽을 가르며 도착한 오래옥이란 곳의 콩나물 해장국은 전날의 숙취와 불편한 속을 시원하게 달래 주는 한 그릇의 보약 같았습니다. 반주로 곁들인 모주는 약재 향이 은은하고 신의 음료처럼 감미롭습니다.
■ 50여년전 개장한 호남 최초의 골프장 - 익산CC
60만 인구를 가진 대도시 전주에서 20여분 거리에 명문골프장이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개장한지 50년이 다된 곳이란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샹테힐익산CC는 회원제 코스로 운영되다 주인이 바뀌면서 익산CC로 이름을 바꾸고 퍼블릭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정규 18홀과 간이 대중제 6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산이 거의 없는 호남평야 한가운데 있는 골프장이라 평탄한 코스레이아웃으로 조성되어 있어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
오르막 내리막의 고저차이가 적어서 업 힐과 다운 힐에 대한 부담이 적은 편이지만 블라인드 홀로 난이도를 조절했습니다. 도그레그 홀을 만나면 캐디에게 꼭 코스를 물어 보고 샷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평지형 위주라 드라이버 샷 이후에는 그린의 위치와 거리를 가늠하기가 좋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다이내믹한 느낌은 조금 부족했습니다 .
그린은 투 그린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옛날 골프장답게 크린 크기는 작은 편입니다 . 그린 크기가 작으니 롱퍼팅의 부담도 별로 없습니다 . 또 그린 언듈레이션이 별로 없고, 마운틴브레이크 등도 없으니 라이를 파악하기에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크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넉넉하고 여유롭게 라운드를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평야지대이니 높은 산도 없고, 예로부터 물산도 풍부한 지역이니 악착같은 면보다는 넉넉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살아온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와 닮은 코스인 듯 합니다 .
향토일간지에 소개된 익산CC에 대한 기사 한줄로 골프장 소개를 보탭니다.
< 서울경제 골프매거진이 선정한 ‘2019 한국美 골프장’인 익산CC의 최고 자랑은 바로 울창한 숲이다. 나무 수만 어림잡아 100만 그루는 되고도 남을 만큼 빼곡하다. 각 홀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메타세콰이아 나무가 거대한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 온통 초록빛이 가득해 눈에 쌓인 피로를 풀고, 도심엔 없는 상쾌한 공기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특히 울창한 나무숲은 옆 홀에 라운딩 하는 것을 보이지 않도록 감춰줘 독립된 공간에서 편안하게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숲은 또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겨울엔 찬바람을 막아줘 4계절 내내 라운딩이 가능하다.
익산CC의 또 하나 장점은 페어웨이가 길고, 넓다는 점.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남성적인 웅장함이 조화를 이뤘다. 길고 넓은 페어웨이 덕분에 초보골퍼도 웬만하면 오비가 잘 안 난다.
그렇다고 코스가 쉽지만은 않다. 곳곳에 산재한 10개의 크고 작은 폰드(연못)와 홀마다 그린 앞에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수많은 가드벙커는 결코 만만치 않은 난이도를 보여준다.
이곳의 시그니처 홀은 서코스 16번 홀(파3)이다. 거리가 비교적 짧은 내리막 아일랜드홀로 샷이 정확하지 않으면 해저드에 빠질 수 있지만 해저드를 둘러싼 주변경관이 한 폭의 풍경화다.
익산CC는 골프여행지로도 최적지다. 인근에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석탑과 왕궁리유적, 그리고 보석박물관 등 관광명소가 많고, 맛깔스럽고 푸짐한 음식을 자랑하는 맛 집도 즐비하다>
말미에 소개한 익산의 명승지는 다음 기회에 둘러 보기로 하고, 다시 전주로 향했습니다 . 처음 와본 곳이라 전주 비빔밥도 맛보고 싶고 사진으로만 봤던 전주한옥마을도 둘러 보고 싶었습니다 .
■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
명불허전입니다.
전주비빔밥은 한식이 낼 수 있는 온갖 맛을 다 뽐내는 복합미의 정수입니다. 형형색색의 재료와 푸짐한 밑반찬의 조화는 눈으로 먹는다는 일본의 카이사키정식 못지 않은 아름다움입니다 . 젊은 친구들 처럼 인증샷 부터 하고 숫가락을 듭니다 .
주중에도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한옥마을은 고요했고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월요일부터 사흘간 화창했던 날씨가 잔뜩 흐려져 을씨년스런 분위기까지 풍겼습니다. 한옥마을 깊숙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살아납니다. 잃어버린 골목에 대한 숱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
치열한 시대의식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최명희의 '혼불' 육필 원고도 만났습니다. 최명희 문학관이 한옥마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남에 박경리 선생이 계시면 호남에는 최명희 작가가 있습니다. 두 여류작가의 '토지'와 '혼불' 이 소설로 쓰여진 한국의 근대사라는 평가를 받는 대작이지요. 아쉽게도 혼불은 읽어 보지 못했는데 문학관을 돌아보며 꼭 읽어 봐야 겠다는 숙제를 스스로 만들고 왔습니다.
동행한 전주의 P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혼불은 호남지방의 민요나 판소리 대목 등이 인용되기도 해서 요즈음 젊은이들도 잘 모르는 생생한 사투리가 담겨진 보고라고 합니다. 문학관 뒷문 벤치에 소설속의 문장 한 귀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 " 사르락 사르락 댓잎 갈며 들릴 듯 말듯 ' 부드러운 봄 바람 한줄기가 대나무 잎을 가르며 지나고 있는 풍광이 눈 앞을 스칩니다.
최명희 문학관을 나와 조금 더 걷다 보면 동학혁명기념관을 만납니다. 여행객이 없어서인지 천도교교당이라 그런지 문이 잠겨있어 아쉬웠습니다. 벽면에 손병희 선생과 동학혁명군의 세 지도자 사진이 눈길을 끕니다. 녹두장군 보다 더 과격했던 혁명가로 알려진 김개남의 초상 앞에 잠시 멈췄습니다.
'혼불' 문학관에서 '토지'를 떠올렸는데 그 소설에 등장하는 김개남을 만났습니다. 동학 의병장이자 상민의 영웅으로 나오는 '김개주' 란 이름의 혁명가. 주인공 서희의 어머니인 별당아씨와 야반도주한 구천이의 생부. 지리산을 헤매며 만발한 진달래 꽃밭에서 화전을 만들어 주고 싶다면서 눈을 감는 별당아씨. 진달래 꽃을 보면 자주 떠올리던 아름다운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올해 복원한 전주감영도 역시 문이 잠겨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지만 혁명가 김개남은 저 아름다워 보이는 곳에서 참수되어 한양으로 보내졌다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직업을 속일 수 는 없나 봅니다.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참 멋진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저 멋진 한마디가 이곳을 찾는 수 많은 여행객들의 품격과 자존감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여행이 실종되어 가는 시간을 안타까이 여기며 여행을 소환하고 있었습니다. " 어리석은 자는 방황하고, 지혜로운 자는 여행한다."
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즐겨 읽는 편입니다 . 기자가 쓴 뉴스나 분석은 팩트를 전달하고 의미를 분석하지만 인터뷰는 사람의 모습과 향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주기 때문에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사람이 나고 자라고 생활한 곳을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그곳에 남긴 추억을 현장에서 듣는 것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 명승지와 문학관도 인상적이었지만 1박2일에 걸쳐 전주 P대표의 일대기(?)를 듣고 온 것도 이번 여행의 큰 수확입니다.
여러곳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야트막한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전주시를 한번 조망하려나 보다 하고 묵묵히 바위산을 올라갔습니다. 15미터나 되는 암벽 아래서 대학신입생 시절 그곳에서 있었던 일과 개인사를 진솔하게 이어가더군요. 그 시절의 일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 기로였다는 이야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은 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삶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다 그의 마음을 더듬어 봅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온 삶에 박수를 보내면서 그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느낍습니다 .
나흘간 먼거리를 이동하면서 5번 90홀 라운드를 마쳤으니 많이 지쳤습니다.다음날 마지막 일정인 선운사CC 라운드와 복분자를 곁들인 풍천장어 식사를 기대하며 일찍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전주를 온전하게 이해 하려면 한 곳은 더 가봐야 한다는 P대표의 강권에 '막걸리 투어'에 나섰습니다.
서울 장수 막걸리도 훌륭하지만 호남의 막걸리들은 시큼하면서도 단맛이 나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납니다. 무엇보다 많이 마셨는데도 다음날 숙취가 별로 없었습니다 .쌀이 좋고 물이 좋아서 그럴까요? 막걸리도 막걸리지만 끊임없이 나오는 안주는 한 주전자 더를 외치는 선순환(?)으로 이어져 결국 해탈직전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
다섯째날, 마지막 대미를 선운사CC에서 장식하고 싶었는데 하늘이 돕지 않습니다. 봄비를 맞으며 라운드 하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습니다. 선운사CC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 곳이니 꼭 돌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엄중한 시기이니 감기가 들면 곤란할 것 같아 부득이 취소했습니다. 복분자와 풍천장어가 아쉬웠지만... 결국 108홀 라운드 계획은 90홀로 정리하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
■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
영호남에는 우리가 다녀온 몇 곳보다 훨씬 더 좋은 골프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궂이 최고의 코스들을 고집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곳을 선택했습니다. 골프여행에서 고려해야할 1순위는 당연히 골프장입니다. 입지와 난이도 관리상태와 그린 피 등,,,
그래도, 남도골프여행은 골프장 보다 더 귀중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먹거리와 볼거리, 수 많은 이야기와 역사의 흔적,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 사람들의 친절함과 넉넉한 여유를 느끼며 편안히 여행할 수 있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어느 광고 메시지처럼, 우리 골프장을 순회하는 내나라 골프여행의 매력과 상품성을 충분히 경험하고 왔습니다. 1박 2일 단순 골프여행에서 부터 3~4일 테마가 있는 골프여행까지 다양한 상품이 인기를 얻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려운 시기에도 광주 C대표와 전주 P대표가 지극정성으로 반겨주어 더 빛나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또 나흘간 함께 웃고 즐기면서도 심각하게 미래를 논의하며 일정을 같이한 두 후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들간에 공유하는 형제애를 다시 확인합니다.
■ 나가며....
앞서 말씀드린 신영복 선생은 '여름징역' 이란 글을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
'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한 부당한 증오와 미움도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더위가 가고, 아침 저녁의 서늘함은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갑니다. 그리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몇 일전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회장이 "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14가지의 교훈"이라는 명상의 글에 몇가지 인상적인 귀절을 만났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 바이러스는 여권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세워놓은 잘못된 경계는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바이러스는 우리의 가족과 가정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등한시 해왔는지를 상기시켜준다. 우리를 다시 강제로 집으로 데려와 집을 재건하고 가정을 결속시켰다”
"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큰 재난으로 보고 있는 반면, 나는 이 바이러스를 ‘올바른 교정자’로 보고 싶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잊어버린 듯한 중요한 교훈을 상기시키기 위해 보내진 것이며,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것이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두 현인들의 따뜻한 메시지에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코로나 극복에 앞장서 평범하지만 귀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긴 글을 마무리 합니다.
▶ 내나라 골프여행 (남도골프-영/호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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